漢文學/詩話叢林

白雲小說 4

지누1 2016. 5. 11. 06:53

(4) 按唐書藝文志 載崔致遠四六一卷 又刊桂苑筆耕十卷 余未嘗不嘉其中國之廣蕩無外 不以外國人爲之輕重 而旣載於史 又令文集行于世 然於文藝列傳 不爲致遠 特立其傳 余未知其意也 若以爲其事績不足以立傳 則致遠十二渡海入唐遊學 一擧中甲科及第 遂爲高騈從事 檄黃巢 黃巢氣沮 後官至道統巡官侍御史 及將還本國也 同年顧雲贈儒仙歌 其一句曰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其自敘亦云 巫峽重峯之歲 絲入中華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國 蓋言十二而入唐 二十八而東還也 其跡章章如此 以之立傳 則固與藝文所在沈佺期 柳幷崔元翰 李頻輩之半紙列傳 有間矣 若以外國人則已見于志矣 又於藩鎭虎勇 則李正己黑齒常之等 皆高麗人也 各列其傳 書其事備矣 奈何於文藝 獨不爲致遠立其傳也 余以私意揣之 古之人 於文章 不得不嫌忌 況致遠以外國孤蹤 入中朝 躪踏當時名輩 若立傳 直其筆 恐涉其嫌 故畧之歟 是余所未知者也

당서 예문지를 보면 최치원의 사륙 한 권이 실려 있고 또 계원필경 열 권이 간행되었다고 한다. 나는 중국 사람은 생각이 넓고 호탕하여 외국인이라고 하여 경중을 따지지 않고 사서에 싣고 또 문집을 세상에 간행한 것을 좋게 생각한다. 그러나 예문지 열전에 최치원의 전을 입전하지 않은 저의를 알지 못하겠다. 그의 사적이 입전에 부족한 것 때문인 것 같다. 치원이 12살에 당에 들어가 유학하여 일거에 중국 갑과에 급제하고 마침내 고변의 종사관이 되고 그의 토황고격문이 황소의 기를 꺾어놓았다. 후에 벼슬이 도통순관시어사에 이르렀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올 때 그해 유선가를 지어 주었다. 그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

 

그의 자서에도 씌어 있다.

 

열두 살에 배옷 입고 중국에 들어갔다가

스물여덟에 비단옷 입고 본국에 돌아왔네.

 

이는 열둘에 당에 들어갔다가 스물여덟에 귀국한 것을 말한 것이다. 그의 행적이 이처럼 뚜렷하게 드러나 있으니 이것으로 입전한다면 진실로 예문지에 올라 있는 심전기 유병 최원한 이빈 등의 반장짜리 열전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만약 외국인이기 때문이라면 이미 예문지에 보인다. 또 진번호용에는 이정기 흑치상지 등이 다 우리나라 사람임에도 각기 그들의 전을 두어 그 사적의 기록을 갖추었다. 어찌 문예열전에만 최치원을 위해 입전하지 않았을까? 나는 혼자 생각으로 추측건대 옛 사람들은 문장에 부득불 꺼리는 것이 있었는데 하물며 치원이 외국인으로서 홀로 중국에 들어와 당시의 명성 있는 무리들을 유린했음에랴? 만약 입전을 해서 곧이곧대로 쓴다면 혐기할까 두려워 일부러 생략한 것인가? 이는 내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