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랫만에 옷이 올라 고생을 한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다.
나는 어려서 산에만 갔다오면 옷이 올라 고생을 했다. 그 치료 방법이란 게 그 시절에는,
"옷은 더러워야 낫고, 옴은 깨끗해야 낫는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고작이었다. 병원에 갈 생각조차 아니 하던 때였다. 그래서 나는 그때마다 '벅벅' 긁어대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으면 어른들이 일러주는 대로 쳐다보기도 쭈삣한 공동묘지엘 갔다. 성냥 한 갑 들고서.
사연은 이렇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옷은 '더러워야 낫는다'는 생각에 죽은 시신과 관계있는 물건들이 더럽다는 거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마을 곁에는 공동묘지가 집안에서도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지고 그곳에 커다란 술공장이 자리잡고 있다. 그곳은 우리 아랫마을과 큰 들 사이에 돌출된 야산이었다. 지금의 내 기억에는 묘들이 여기 불룩, 저기 불룩 불거져 있고 모두가 잔디로 덮여 있었다. 그곳에 가면 탈관해서 버린 판자조각, 댓가지 들이 뒹굴고 있는 거다. 그것을 주워서 불을 피우고 그 연기를 쏘이고 나면 신기하게도 옷이 세력을 잃었다. 그리고 며칠 사이에 낫는 거다. 그걸 나는 수도 없이 반복해야 했다.
산에 갔다. 옷이 올랐다. 공동묘지에 갔다.
또 산에 갔다. 또 옷이 올랐다. 또 공동묘지에 갔다.
또또 산에 갔다. 또또 옷이 올랐다. 또또 공동묘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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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또~ 산에 갔다. 또또~ 옷이 올랐다. 또또~ 공동묘지에 갔다.
어린 게 그러는 게 측은했던지 우리 아버지, 그냥 옷칠을 내서 내게 먹이셨다. 한 번만 고생하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는 말씀에 나는 겁도 없이 옷칠을 잘도 먹었다. 여기서 옷칠이란 참옷나무 껍질을 벗겨서 뭉쳐 닭의 배 안에 넣고 푹 끓이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옷닭 비슷한 거다.
아니나 다를까 내 몸은 옷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온통 부어올라 내 모습이 사라질 정도였다. 그 여린 살에 옷이 안 오른 부위가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겁이 덜컥 난 나는 아마도 낑낑 앓았을 거다. 보다 못하신 우리 아버지, 나를 이끌고 예의 그 공동묘지로 가셔서는 당신 손수 불을 피워놓고 연기를 쬐이며 불을 이리 넘고 저리 건너뛰라 하신다. 눈은 연기에 매워 눈물까지 흐르지, 불은 뜨겁지, 몸은 온통 가렵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였을 거다.
그렇게 호되게 거의 한 달을 앓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산에 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잠재의식 때문인지 개옷나무만 봐도 피해 왔다. 웬지 무서운 거다. 과거의 고통이 내게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거다. 그 이후로 한 55년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산에도 가고 풀밭에도 가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게 다 우리 아버지 덕.
일화 하나,
내가 경기여고에 처음 부임해서 첫해 봄. 학생부 교사 모두가 대모산으로 봄놀이를 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두릅이 마침 잘 자라고 있어 우리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꺾어들고 음식점에 앉아 데쳐서 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앗뿔사 그 두릅에 개옷나무순이 섞여 있었지 않은가! 누군가가 두릅인지 개옷순인지 구별을 못한 거다. 아니 안 한 건지? 한참 먹는 중에 내가 한 마디,
"이건 두릅이 아닌데............ 이건 옷나무야!"
열댓이나 되는 선생님들 모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누가 그 없어진 개옷순을 먹었는지는 그 자리에서는 아무도 모른다. 먹은 이는 모르고 먹었으니까. 그런데 그 선생님들 중에 유난히 가까워서 서로 눙치는 모습이 도를 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서로 시비를 못 걸어 안달이 난 정도로 보일 지경인 두 분 선생님이 계셨다. 그 두 분이 개옷순을 서로 상대가 꺾어왔다고 우기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서로 양보라고는 없는 두 분이라 승부(?)가 나지를 않았다. 마침 그 옷순은 그 두 분이 앉았던 곳의 접시에 올려져 있었다. 아마도 두 분 중에 한 분이 먹었을 거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궁동성으로 내일, 모레 보면 안다고, 범인(?)이 누구인지 안다고 결론을 내고는 끝마무리를 했다. 도저히 가려낼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며칠 후에 정말 두 분 중에 한 분이 옷이 올라 얼굴이 벌건 채로 겸연쩍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범인은 결국, 그분이 아니라 그분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다른 분이 그랬다는 걸로 결론이 나서 우리는 한참 깔깔대고 웃은 일. 그런데 정말 가슴 아프다. 옷이 올랐던 그분. 나보다 딱 한 살 아래 국어과 동료. 술 한 잔 못하시고, 남과 다툼 한 번 아니 하시고, 신소리 아니 재치로 남을 참도 즐겁게 해 주시던 그분은 지금 우리 곁에 없다. 갑자리 뇌졸중으로 타계하신 지 서너 해. 우리 일행 다섯이 그분의 묘엘 가려고 시골집 그분 큰댁엘 들렀더니 그분 형수께서 눈물바람을 하시며 우리를 산소까지 안내하시고 휑하니 가시고 만다. 얼마나 속이 상하셨으면..........
"우리 서방님, 아까워서 어쩔게라우."
오늘은 마침 오선생님과 황선생, 황고 그리고 나 이렇게 만났다. 토요일 수채화반에 가서 상렬이를 오랫만에 만나고 종강이래서 얼굴이라도 보이려고 들러 이약이약하다가 황고가 데리러 와서 우린 황룡장에 갔다. 가서 설기 먹이 사고 부탄가스 사고나도 시간이 남는다. 그래서 따르릉으로 연락. 황선생께서 화롱장으로 오는 대신 우리가 유탕으로 가겠다고.
"그래, 나야."
"황선생님, 저 진웁니다."
"아, 아니 뭐라구요?"
"나, 진우라구요. 이거 황고폰입니다."
"아, 예 나는 황곤 줄 알고요."
"시장에서 뭐 사실 거 있나요? 우리가 사 가지고 갈 터이니 유탕 한우촌에서 만나요."
그렇게 해서 나는 양파 한 차대기, 고추 한 가마니를 사들고 출발. 목적지 한우촌에 도착해도 시간이 남는다. 안에 들어가니 사장이 황고를 보고는 반색을 한다. 한 쪽에 앉아 기다리니 황선생 차가 들어온단다. 그런데 소식이 한 동안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밖에서 우리를 기다렸단다. 내 차가 없으니 안 온 줄 알았다는 말씀. 오선생님 도착에 맞추어 입실. 애호박찌개 넷. 오늘은 황선생께서 빨랑카.
넷이 출발해서 백양사 설경을 보자고 하다가 가는 도중에 황선생께서 가 보고 싶은 마을이 있대서 거기로 진로 변경. 巽龍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니 마을 개들이 시끄럽다. 폐가도 하나 보고. 들고양이도 보고 등등등...............
오선생댁에 들러 맛있는 군고구마를 먹고, 시원한 싱건지도 한 병 얻어들고............ 황선생왈,
"꼭 친정에 왔다가는 딸 같은 기분입니다."
갑자기 황고가 오선생댁으로 가는 도중에 이런다.
"오늘 옷닭이나 한 마리 삶을까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러지 뭐."
황고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따르릉을 한다. 세 시간은 삶아야 한단다. 그러니 지금부터 삶아야 한다고 서두르는 거다. 황고댁이 고생하게 생겼다. 그리고는 우리는 오선생댁에 도착. 입구에 모란을 심으려고 지난 가을에 파놓았던 구성이가 그대로 비어 있다. 내가 작은 포기 두 개를 가지고 가서 안쪽에 심고는 그곳은 아직도 비워 있는 거다. 묘목을 못 구하셨단다. 그래서 황고가 가져가기로 한 우리집에 있는 목단을 옮기기로 황고와 입을 맞추고.......... 황고왈,
"그럼, 저 빈손으로 온 거 아닙니다. 제가 다음에 책임지고 옮겨 심겠습니다."
반색을 하시는 사모님 왈,
"그럼요. 봄에 심어요." 하신다. 그 모란에도 사연이 있다. 몇 해 전 사모님과 사군자를 배우러 다닐 때 모란을 가을에 한 무더기를 드려서 옮겨 심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그만 봄에 꽃을 한 번 피우고 죽어버린 거다. 옮겨 심은 해에는 꽃을 피워도 안 되고, 가지치기도 해 주고 양분도 듬뿍 주어서 뿌리가 튼실해진 다음에 꽃을 피워야 하는 걸 모르신거다. 일러주지 않은 내 불찰이 크다.
장장 두 시간을 이약이약하다가 우리는 황고차에 셋이서 타고 출발. 황고는 길도 잘 안다. 아직은 눈이 안 녹아 미끄러운데도 황고는 운전을 참 안전하게 잘도 한다. 장성에 거의 다 와 가는데 황고가 그런다.
"두분 선생님께서 댁에 가 계세요. 제가 가서 솥째 들고 가지요."다. 편안한 자리에서 바글바글 끓여가면서 먹는 게 제맛이란다. 우리가 좋다니까, 한우촌 출발지점에 우리를 내려준 황고는 떠나고..... 황선생과 나는 우리집으로.
그렇게 해서 나는 제대로(?) 된 옷닭을 먹게 된 거다. 한식조리사인 황고는 음식 성향에도 해박하다. 나는 달라는 그릇만 챙기면 되었다. 고기도 먹고 누런 국물도 먹고 우리아버지, 황선생, 황고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실컷 먹고 나도 반이 남는다. 황선생은 국물이 좋다고 네 그릇이나 드셨다. 황선생 왈,
"장작이네.........."
그런데 나는 그 말씀을 한 귀로 흘려 들었다. 황고는 그릇을 바꾸고 영업집이니까 큰솥을 가져가라니 옮기면 음식맛이 떨어지니 그대로 두고 먹으랜다. 그래서 내가 황고도 가고, 황선생도 가고 나서 뒷설거리를 하면서 보니 아니 이건 정말 장작이었다. 누런 장작 이 넷, 그리고 작은 가지들이 수두룩하다. 이렇게 많이 넣는 거는 금시초문이다. 그리고 그것도 생옷 같아 보였다. 막걸리도 여러 잔 했으니............. 그러니 내 체질로 견뎌낼 수가 없을 수밖에... 더구나 연로하신 아버지, 황선생, 황고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이러니 뭐 팔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연만하신 아버지가 괜찮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나머지를 끓여가면서 아버지와 나는 끼니때마다 한 그릇씩 먹었다. 그러다 어제부터 사단이 난 거다. 팔에 옷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설마 했는데 그런다. 황고가 득달같이 약국에 가서 약을 사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
"음식점 옷은 옷이 아닙니다. 이 정도는 돼야 옷이고 약이 되지요." 하고는 웃는다. 그러싸해 보여 나도 같이 웃는다.
어제밤부터는 심각하다. 두 팔굼치부터 손목까지, 두 허벅지부터 발목까지가 온통 시뻘겋게 발진이 보인다. 가렵다. 많이 가렵다. 그래서 오늘 아침부터는 나는 아니 먹고 아버지만 드렸으니 아직도 두서너 그릇은 남아 있을 거다. 참 많기도 하다. 필암서원 공부를 마치고 <고향나들이>에서 점심을 먹으며 그 얘기를 했더니 그곳 사장님 꼭 황룡보건소에 들렸다 가란다. 갔더니 의사 선생님 왈,
"아주 심하시군요. 몇주 고생하셔야겠는데요."
"몇주씩이나요?"
그리고는 주사도 놓아주시고, 약도 5일 분을 지어 주시며 하시는 말씀,
"매일 오셔서 주사 맞으세요."다.
그리고 치료비 일금 900원. 내가 놀라니 그냥 웃으신다.
내 팔
차마 거시기해서 다리 허벅지는 찰칵을 포기했다
사실은 그냥 개기려고 했다. 그래야 확실한 면역이 생길 거 같아서라고 반신반의하면서,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황룡보건소가 손에 잡히는 게 아닌가!
내가 옷닭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이렇다.
옷닭은 위의 기능을 강화해준단다. 나는 선천적으로 약한 위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명절이 되면 떡을 먹게 되고 떡을 먹으면 꼭 나는 신트림을 한다. 고약한 트림이다. 그게 나는 싫다. 과학적으로 분석(?)을 하면 아마도 나는 가루를 소화시키는 능력이 모자랄 거다. 밀가루 음식을 즐겨하지 않는 거를 봐서도 그렇다. 그런데 거기다 우리집 병력.
선비께서는 위암으로 작고, 외삼촌께서도 위암으로 작고, 내 여동생도 위암 수술을 한 병력. 그러니 내게도 위암 인자가 있을 거라는 거다. 암의 90%가 유전적인 요인이라고 믿고 있는 나니까 거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옷닭을 먹은 거다. 어릴 때 옷칠을 해 먹어서 면역이 있다고 생각한 나는, 서너 달 전에 광주의 옷닭집에서 옷을 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고 멀쩡했다. 그걸 믿고 그냥 먹은 거다.
이번에 병을 이겨내고 나면 아마도 영구히 면역이 생기리라. 남들 말이,
"옷은 말려서 끓이면 괜찮아요. 생옷은 안 오르던 사람도 오른답니다."
그게 아마도 사실일 거다. 그런데 나는 이제 생옷도 안 오를 거다. 그걸 위해 약까지 득달같이 사들고 온 황고에게 감사하며 몇주 고생을 해야겠다.
대신에 술은 금물 - 전국적으로 훨씬 빠른 속도로 번지게 한단다.
몸을 덥게 하지 마세요 - 이 추운 겨울에 어쩌라고?
물을 많이 마시세요- 이건 할 수 있겠다. 자 물 마시러 가자, 아자아자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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