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늦게, 늦어도 한참 늦게 장가를 들었다. 내 나이 설흔하고도 일곱. 우리 부모님 애를 많이도 태워 드렸을 거다. 태웠다가 아니고 태워 드렸을 거다라고 한 것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곁에서 뵙지를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내가 고향을, 우리 나이로 스물하나에 떠났으니 서울에서 16년을 산 때였다. 내 엄친께서는 스물여덟에 나를 낳으셨으니 그때 연세가 지금의 내 나이 또래셨다. 어머니께서는 한 해 아래셨으니 두 분 모두 환갑을 훨씬 넘기신 때였다. 그러니 그 시절에 얼마나 애가 타셨을까? 거기다 나는 8남매의 위로 누나 한 분 모시는 장남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 부모님께서는 내게 선을 보게 하신 딱 한 번을 제하고는 장가가라는 말씀을 단 한 번도 내게 직접 하신 적이 없으시다. 말씀은 없으셨지만 그 속마음이 오죽하셨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내가 그렇게 늦은 것은 참 여러 가지 사연이 있다.

 

결론은 이거다. 지금의 내 아내 소정을 만나려고 하늘이 내게 기회를 늦춰준 거라는 거다. 선인들은 그걸 緣分이라고 했다. 그 연분을 기다리느라고 그렇게 늦은 거라는 거다. 그렇게 만나서 우리가 산 세월이 서른 해다. 그 결과 예쁜 딸 하나, 듬직한 아들 하나. 우리는 그 아이들을 보면 그냥 마냥 행복하다.

 우리 예쁜 딸이고,

 IMG_4891.JPG

 

우리 듬직한 아들이다.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딸아이가 우리 30주년 기념일이라고 맛있는 저녁을 <포도식당>에서 사 주더니 캐익까지 사들고 와서 이렇게 촛불까지 환하게 밝혀 준 거다. 아들아이가 곁에서 내 손전화로 찰칵한 거다. 내 표정이 재밌다고 아이들이 막 웃는다. 그리고 딸아이는 그게 마음에 든다고 내 손전화를 달래더니 제 손전화로 사진을 전송한다. 아마도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딸아이는 또 예쁘게 웃을 거다. 내복 바람에 발까지 내놓고.......... 조금 거시기하다.

 

 

여기까지가 저녁때 일이고.......

 

앞서 낮에는 내가 축구센터에서 지난 밤을 보내고 들어와 아내에게 준 선물. 샤넬5. 그 조촐한, 아니 미약한 선물에도 아내는 참 좋아한다. 그리고 아내가 참 좋아하는 색깔의 장미 서른 송이. 꽃배달을 시켰더니 그렇게 꽃을 받아 보는 게 참 좋단다.

 

저녁을 먹고 같이 들어온 딸아이 눈이 커지고 탄성이 터진다. 와아, 예쁘다앙. 부럽다는 야그다. 지는 나중에 더 예쁜 걸 받을 거면서..........

 

 

 

그렇게 내 아내는 소박하다. 작은 것에도 감탄할 줄 알고, 고마워한다. 아내와 딸아이 아들은 내게 욕심을 절대 부리지 않는다. 내 능력을 알아서고 내 취향을 속속드리 알아서일 거다. 나는 그래서 항상 고마워한다.

 

나는 아버지를 모신다는 핑계로 아내와 아이들과 300km나 멀리 떨어져 산다.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아쉬워한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연만하신 아버지 혼자 시골에 계시는 것을........... 우리 가족 모두가 애교스런 투정(?) 말고는 잘 이해해 준다.

 

"아내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당신 내려갔잖아?"

"아가는 아빠랑 같이 살고 싶어어........."

 

이구동성으로,
"안 돼!"

그러면 내가 어쩔 것인가? 아버지 혼자 계시게 하는 수밖에. 그런데 나는 지금 아버지와 매일 겸상을 한다. 이게 다 우리 세 가족의 희생 덕(?)이다. 그리고 원래 말수가 적은 내가 아버지께 수다를 떠는 시간이기도 하다. 과거의 얘기는 나보다 아흔하고도 다섯이나 되신 아버지가 더 잘 기억하신다.

그래서 나는 서울나들이를 해도 오래 있을 수가 없다. 많아야 사나흘이다. 어떤 때는 당일치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꽤 길었다. 12일에 센터에 가서 신체검사를 하고, 13일에는 혼인기념일이라고 아들이 사 준 표를 들고 아내와 함께 <밋션임파서블4>를 보고, 14일에는 치과에서 고문을 30여 분 당하고, 초등학교 벗들을 만나고, 15일에는 르망팀을 만나고, 16일에는 경기여고팀을 만나고, 17일에는 2시에 주영이 혼인에 잠깐 얼굴을 내밀고, 그 길로 센터 송년회에 참석차 포천행, 18일 하루 쉬고, 19일에는 어머니 제사를 모시고, 20일 9시차로 하향, 2시에 약초강의를 듣고 그랬다. 참 숨이 가쁘다.

 

아내는 내가 있는 여드레 동안 참 많이도 나를 위해 주었다. 참 오랫만에 같이 있어서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힘이 들었을 터인데도 대놓고 불평 한 마디 안 한다. 내가 참 귀염을 많이도 받았다는 야그다. 아내는 어머니다. 남편은 애고. 그래서 나는 애고, 소정은 어머니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모른다. 나도 어머니인 소정의 사랑을 반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모르는 것처럼 내가 그렇다. 치과의사인 현이씨가 한 말,

 

"참 많이도 놀랐어요. 그렇게 씩씩하시던 소정 선생께서 그 정도 이 치료에 힘들어 하시다니요."

 

그 말인즉슨, 내 아내도 이제는 팔팔한 청춘이 아니라는 거다. 내가 그걸 모를 리 없지만 하나도 보탬이 되어 주지 못한다. 그저 멀리서 말뿐이다. 흔히 남자들이 하는 말,

"아프면 병원에 가 보지, 미련을 떨기는.........."

그것도 나는 가까이서도 아니고, 멀리서 전화로 그런다. 그러나 속마음은 아프고 미안하기 그지없다. 아플 때, 아니 젤 긴요할 때 곁에 있어서 흰죽 한 그릇 끓여주지도 못하면서 입은 살아가지고......... 그런 나는 지금 코가 시큰하다.

 

아내에게

 

곱던 손 내려다보며 어머머 이 잔주름

곁에서 듣는 가슴 싸아하고 안쓰러워

이 못난 남정네 곁에 머물었던 탓이지

 

"여보오, 많이많이 더 많이 사랑해요." 

출처 : 문례헌서울사대국어과22
글쓴이 : 진우김홍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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