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婦孺人晉州蘇氏之墓
孝婦蘇氏甫, 踰筓歸金永允, 越五年戊辰十二月五日庚申, 急痞而歿, 得年二十一. 其舅碧湖金肯鉉甚悼惜之, 不欲其同於凡墳而謀所以表之者, 石旣具, 請於余曰,
“新婦性溫靜, 語言有度, 步履以正, 一言蔽之曰不凢(=凡). 善事我, 而宜家人, 閨門之內, 和氣藹然. 雖婢背有大過, 止曰汝何失常度而已, 不出惡言以詈, 亦不言畜生. 此文饒之所難. 吾嘗患痢, 一晝夜十餘上厠, 夜則新婦伺吾起, 如持燭立圖外容, 光以照內, 盖慮登降跧躓也? 病且滿三月, 食性全失, 如嚼絮. 然, 新婦雪裏採菜, 菜蔬魚肉, 一案十數合, 亦冀吾隨合下箸, 以或有可口者, 未嘗有一日間. 古語云, ‘孝則生福.’, 心中期以唐夫人緣. 吾祗簿失此賢哲, 痛矣乎哉!"
余曰, ‘夫子以人不問其父母昆弟, 稱閔子之孝, 今於孝婦, 孰能問其舅之言? 孝旣如此, 而天且無育, 誰尢尢(=尤)眞宰乎?’
蘇氏晉州著姓, 父禹永, 祖前度支部主事錫斗, 大提學陽谷諱世讓后. 永允光山大姓, 黃龍湖又名家, 序次世德實行.
系以銘曰,
嗟哉孝婦! 天性芳玆! 胡秀不實, 長令舅悲? 至行難泯, 石以揭辭! 戒爾樵牧, 無或近之!
歲庚午 正月 下休
濯新 金漢穆 撰
少石 奇東衍 書
효부 유인 진주 소씨의 묘
효부 소씨는 16세에 김영윤에게 시집와서 5년이 지난 무진1928년 12월 5일 경신에 갑자기 배앓이를 하다가 죽으니 나이 21세였다. 그녀의 시아버지 벽호 김긍현이 이를 매우 슬퍼해서, 여느 무덤과 똑같이 하고 싶지 않아 비석까지 이미 갖춰놓고서 나에게 청하며 말했다.
“새 며느리는 성정이 따뜻하고 조용하며 말에 법도가 있고 걸음걸이도 단정했으니, 한 마디로 말해서 평범하지 않았다. 나를 잘 섬겼고 집사람과도 화목하여 안채에는 화기가 넘쳐흘렀다. 비록 여종이 뒤에서 크게 잘못된 행동거지를 해도, 단지 ‘너는 어찌하여 상도를 잃었느냐?’라고 할 뿐이지 악한 말로 꾸짖지 않았으며, 또한 짐승처럼 취급하여 말하지도 않았다. 이는 글을 넉넉하게 읽은 이도 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일찍이 이질에 걸려 하루 밤낮을 십여 차례나 뒷간에 올라갔는데, 밤이면 새 며느리는 내가 일어나는 것을 살피다가 촛불을 들고 서서 밖에서 불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해서 안을 비추고 있었는데 아마도 오르내리다 넘어질 것을 염려해서였다. 병세가 꼭 석 달이나 가서 식성을 모두 잃어 마치 솜을 씹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새 며느리가 눈 속에서 나물을 뜯어다가 채소와 어육을 한 밥상에 십 수 그릇이나 차려서, 접시에 따라 젓가락이 가기를 바라고서는 구미에 혹 맞는 것이 있으면 일찍이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옛 말에 이르기를 ‘효도하면 복이 생겨난다’고 해서, 마음속으로 저 사람과의 인연을 크게 하려고 기약을 했더니 내가 복이 없어 이런 현철을 잃었으니 아프고도 아프도다.”
나는 말한다. 부자께서는 남들이 그(閔子)의 부모와 형제들이 하는 말을 따지지 않았기에 민자(閔子)의 효를 칭송하셨는데, 지금 효부를 칭찬하는 그 시아버지의 말을 누가 따질 수 있겠는가? 효행이 이미 이와 같았는데도, 하늘이 장차 돌보지 않았는데 누가 조물주를 탓하고 탓하랴?
소씨는 진주의 저명한 성씨로 아버지는 우영이요, 할아버지는 이전 탁지부 주사 석두로 대제학을 지낸 양곡 휘 세양의 후예이다. 영윤은 광산인으로 황룡호의 명가인데 차례로 대를 이어 아름다운 덕을 실행하였다.
이어 명하여 왈,
아아! 효성스런 며느리여! 타고난 성품이 아름답도다! 어찌 꽃만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여 두고두고 시아버지를 슬프게 하는가? 지극한 효행 잊기 어려워 돌에 사연을 새겨 너희 초동과 목동에게 경계하노니 혹여라도 묘비에 가까이 하지 마라!
경오1930년 정월 하순
탁신 김한목 짓고
소석 기동연 쓰다.
* 인곡 선생께서 번역을 도와 주셨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머루포도 (0) | 2017.07.17 |
---|---|
[스크랩] 머루포도 (0) | 2017.07.17 |
[스크랩] 또거길갔다16차 (0) | 2017.02.19 |
020광화문14차 (0) | 2017.02.08 |
牧虎孝子碑 (0) | 2016.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