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식구들이 워낙 추위를 타서 나는 불 피우기에 여념이 없고 아이들은 불 앞에 앉아 등을 대고 따뜻해 한다. 벽난로가 구세주인 셈이다.
희준이는 밤 치기에 여념이 없고 희선이는 곁에서 구경이다. 일화 하나,
아주 오래 전이다. 내 아내 소정이 <더불어세상>이라는 시사잡지를 내던 때이니 꽤 오래 되었다. 희준이는 사진기자였으니 경북 의성쪽으로 취재를 갔다. 의성김씨 종가 취재차였다. 종가를 찾아갔는데 마침 제사를 모시는 때였었나 보다. 밤을 새워가면서 제사를 준비하는 때였단다.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이 모여서 제사 준비를 하는데 우리 희준이가 같이 있다가 밤이 나오니 그걸 치켜들고 사진처럼 밤을 치기 시작했나 보다. 그랬더니 종가의 어르신들이 젊은이가 밤을 칠 줄 안다고 무척이나 대견해 하고 예뻐했단다. 희준이가 집에서 제 할머니 제사 때마다 밤치는 걸 보고 배우더니 그 보상을 톡톡히 받은 거다. 아내 소정은 두고두고 그걸 얘기한다. 아들 자랑은 누구나 하고 싶은 거 아닌가? 어머니라면 다 자기 아들이 제일 잘 생긴 거 아닌가?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지 않는가?
오늘 아침에도 아내 소정과 함께 버스를 타러 나오는데, (우리집 앞 버스정거장에는 공항버스가 같이 선다) 어떤 청년이 버스정거장에 커다란 여행가방을 곁에 놓고 서 있는데 저만큼에서 부인네가 달려오는데 얼굴에는 온통 벚꽃이요, 팔을 벌리고 뛰어오면서 하는 말,
"우리 아드으으으으ㅡㄹ........."
아들은 껴안는 걸 보고는 소정이 하는 말,
"아마도 외국여행을 한두 달쯤 하고 돌아오는 모양이네."
내 말이,
"세상의 모든 엄마가 저럴 거야..........."
차례를 준비하는 데 경황이 없어 찰칵을 하나도 못했다. 오직 건진 건 딱 이거 하나. 차례상에 올랐던 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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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쑥떡은 유인당 선생께서 손수 쑥도 캐시고 쌀도 농사를 지으셔서 만들어 내게 주신 정성이 담긴 것이다. 아내가 우리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곱고 예쁜 것을 좋아하셨다고 위에 예쁜 떡을 올린 거다.
위에서 경황이 없다는 것은 사연이 이렇다.
우리 아이 둘은 차례를 모시고 11시반 차로 상경해야 했다. 그러니 시간의 여유가 없을 수밖에. 그래서 부랴부랴 이거저거 챙기고 아이들을 터미널에 데리고 가서 차를 태워 보내고 돌아서서 오면서 떨어진 휴지와 내가 생각없이 적게 사서 모자라는 떡국떡을 사고 역앞을 지나오는데 소정이 전화를 했다.
"여보, 서울행 차표를 구할 수 없을까?"
"없어요."
"알았습니다. 와서 얘기해요."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소정은 25일에 귀경하기로 차표까지 마련해 놨는데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할 때는 뭔가가 있는 거다.
집에 들어오니 소정이 벽난로 앞에 앉아 넋을 놓고 있다. 눈에는 눈물도 보인다. 뭔가가 심상찮다. 그래도 물을 수가 없다.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여보, 막내숙모가아..........."
"왜?"
"열 시에 돌아가셨대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잊었다.
그래서 장성에서는 아예 차편이 없으니, 광주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검색해서 3시반 차표를 예약했다. 그리고는 출력이 안 되니 좀 일찍 나가자고 했다. 장성에서 광주행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표를 받은 다음 서울행을 타야 하기 때문이다. 대충 차례 뒷처리를 하고는 1시반 출발. 터미널 앞에 주차를 하는데 내가 서툴렀더니 소정선생이 참 조심스럽게(이럴 때는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하는 말,
"내가 함 해 볼까? 좀 재고 싶은데에.............."
정말 소정선생은 한주차 한다. 단 한 번에 주차를 하고는 터미널에 갔더니 웬 걸,
서울행 임시차가 부릉부릉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야 혹시나 하고는 빈자리 있어요 했다. 기사왈,
"네 자리 있어요. 빨리 차표 사오세요."다.
우리는 웬 떡이냐 하고는 매표소엘 가서 말했더니 없단다. 그러더니 매표아가씨가 뛰어가서 기사님께 확인을 하고는 기다리란다. 매표를 했던 이가 시간까지 안 오면 태워주겠단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고 시간은 가고, 결국 표를 구해서 출발. 내 말이,
"복 있는 사람하고 같이 다니니 이런 복이 있네에.........."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
광주에서 출발하는 표를 취소하는 일.
아내는 희준이에게 전화를 해서 취소시키랜다. 그래서 희준이에게 전화를 하는데 신호가 가는 사이에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
'아니, 아직도 차를 타고 가고 있을 터인데.............."
내 말이,
"아이들 지금 가고 있겠네."
"그러네."
그래서 내가 스마트폰을 들고 나섰다. 차표 취소 시도.
한참을 헤매다 결국 성공. 곁에서 소정선생이 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주먹짱을 세 번씩이나.
그리고는 한 잠을 콜콜콜. 그러고는 깼더니, 아직도 풍세를 못 벗어났다. 기사님은 국도로 고속도로로 안 막히는 길을 찾는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가? 남천안에서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섰는데.............. 그 웬수같았던 <풍세>를 못 벗어났단다. 4시간을 쉬지 않고 왔으니 방광이 포화 상태. 승객 한 분이 화를 낸다. 기사님 왈,
"저도 힘들어요. 화를 내시면............"
풍세에 도착해서 간이화장실에서 쉬를 하고는 출발. 겨우겨우 달려서, 버스전용차로도 별 소용이 없었다. 강남에 도착하니 9시다. 2시에 출발했으니 7시간이 걸린 셈이다. 내 생각에는 그래도 다행이다 싶은데 소정선생은 녹초다. 그래서 우리는 곧바로 문상하려던 계획을 바꾸었다. 내일 문상하고 나는 곧바로 하향하고 소정선생은 밤샘을 하고 장지까지 가기로.
아이들은 우리가 도착하니 눈이 화등만 해지고........ 하룻밤을 지나고 12시에 출발해서 구로고려대병원에 도착하니 2시10분. 처가의 낯익은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마도 한 20분 지나 염치없게도 일어섰다. 큰처삼촌께서 내게 글씨를 하나 쓰라신다. 곁에서 처형도 하는 말.
"나도 하나, 流水不腐요다."
평소에 많이도 생각을 했던 문구였나 보다. 나는 대답을 아니한다. 처삼촌께도 처형께도..........
하직을 하고 나오는데 그 처형 장례식장 입구까지 따라오면서 배웅을 해 주신다. 그러면서 가면서 과자 사 먹으라고 내 주머니에 구겨 넣으신다. 옥신각신이 싫어서 그냥 하직하고 나서 터미널에 도착해서 보니 5만 원이나 내 주머니에 넣으신 거다. 그 처형은 내 아내 소정의 사촌이다. 그이 부군은 내 대학교 후배다. 지금은 하동, 아니 화개 산골에서 야생차밭 400평을 얻어 그걸 경작하고 있단다. 그래서 부부가 한 해에 한두 번 만난단다. 우리 보다 더하다. 우리는 한 달에 한두 번은 만나는데............ 그 동서가 했다는 말, 간호원이 손을 만지면서 그랬단다.
"할아버지 피부가 참 고와요."
그게 그 동서에게는 큰 충격이어서 처형에게 따르릉을 해서 하소연을 하더란다.
나는 그 동서의 전화번호를 내 폰에 저장을 하고............
걸어서 10분. 공짜 전철을 타고 27분. 고속버스로 3신간반. 차로 5분. 다시 집에 왔다가 표를 가지고 가서 표 반납하고 저녁 먹고 그렇게 밖에서 하루가 갔다. 아버지 잘 계시고 설기도 반갑단다. 감사 감사 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