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昔余己亥年間。與車五山往謁鵝溪李相公。壁上掛一長律。卽崔東皐 岦 詩也。其頷聯曰。未期楚戶亡秦日。猶戒吳兵入郢年。蓋傷時之作也。相公目某曰。君試觀此作。以楚比之誰歟。答曰。比之我國矣。又問曰。以秦比之誰歟。答曰。比之倭賊矣。曰。以吳比之誰歟。曰。比之倭賊矣。以郢比之誰歟。曰。比之我國矣。問答旣訖。曰。其可以如是乎。蓋秦楚吳郢四字。沓入於二句之中。凡喩繁疊。此實詩家之所忌。東皐不深於詩學。故未免此等之失。李相之言。實非妬才而發也。李相不取崔詩。其來久矣。當高苔軒 霽峯晩年。改號曰苔軒。 以書狀官赴京日。崔爲質正官。沿途唱酬甚多。及高崔之還也 李相借來其詩卷 見初面唱和數三首。甚厭崔詩。使人裁紙粘付崔詩。然後取見其卷。其厭之也深矣。李相未嘗輕侮人才。而至於崔詩。每發言輒詆之曰。唯知者知之耳。
옛날 기해년간에 내가 차오산과 아계 이상공을 가서 뵈올 때, 벽위에 장율 한 수가 걸려 있었는데 곧 동고 최욱의 시였다. 그 함련.
기약없이 초나라가 진에게 망할 때
오히려 오군이 영에 들어오는 것을 꺼렸네.
아마 때를 슬퍼하는 작품일 것이다. 상공이 눈짓으로 내게, 그대는 이 시를 보게, 초로써 무엇을 비유한 것일까?라 했다. 내가 우리나라를 비유한 것일 겁니다라 하자, 또 진으로써 무엇을 비유한 것일까?라 물었다. 내가, 왜적을 비유한 것일 겁니다라 하자, 오는 무엇을 비유한 것일까?라 해서 내가, 왜적일 겁니다라 했다. 영은 무엇을 비유한 것일까? 내 대답. 우리나라를 비유한 것일 겁니다. 문답이 끝나자 그것을 이같이 해도 될까?라 했다. 아마 진초오영 네 자가 두 구 안에 들어 있어, 무릇 비유가 번거롭게 겹쳤으니 이는 실로 시가가 꺼리는 것이다. 동고는 시학에 깊지 못해서 이런 등속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진실로 이상공의 말은 재주를 질투해서 한 말을 아니다.
이상공은 최립의 시를 취하지 않은 것이 그 이래로 오래 되었다. 고태헌은 재월이, 만년에 호를 고쳐 태헌이라 했는데, 서장관으로 북경에 갈 때 최는 질정관이 되었다. 길가에는 주고받은 시가 아주 많았다.
고경명과 최립이 돌아오자 이상공은 그 시권을 빌려와서 첫 쪽에서 창화한 세 수를 보고서는 최립의 시를 아주 싫어해서 사람을 시켜 종이를 잘라 최립의 시를 붙인 다음에 그 시권을 보았을 정도로 최립의 시를 싫어했다. 이상공은 일찍이 인재를 가벼이 여겨 모욕하지 않았었는데 최립의 시에 이르러서는 매번 헐뜯어 말하기를 아는 이만이 안다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