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國朝文章之士 莫盛於成宣兩朝 而詩才之盛 宣廟朝為最 比諸皇明 其嘉隆之際乎 宣廟朝 詩文之兼備 當以簡易為首 簡易 銀臺二十咏 盖李靑蓮後白 為堂后時 呼新魁試才 使之一進退 各成一律者 而篇篇皆有味 其中枯木結局〔句〕 苔蘚作花蘿作葉 還知造物未全捐 語甚新奇 且延興府院君宴席所賦 避暑風流傾北海一律 一時諸文人 皆閣筆 以今觀之 此作儘好 而知其好者必鮮 雖知 亦不必閣筆 以長其聲價 盖當時則有眞知者 故爾 簡易自許以天下文章 不可草草自奉 以荏飼牛 而食之 平居必錦帳繡袍 接待朝士極傲 而其時文人皆受以不忤 多有受業者 亦多推轂 至除槐院提調 此由於眞知其文章之可責故也
우리 조선에서 문장을 하는 선비들이 성종 선조 양조 때보다 성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시재의 성함은 선조조가 제일이었다. 여러 중국 왕조에 비긴다면 가정 융경의 시대와 같다. 선조조에는 시문을 겸한 이로는 응당 간이를 첫째로 삼는다. 간이의 은대이십영은 아마도 청연 이후백이 승지가 되어 새로 장원한 이를 불러 재주를 시험해서 그를 승진시켰을 때, 각기 율시 한 수씩을 지은 것으로 편마다 모두 맛이 있다. 그 중에서 고목이란 시의 결구에,
이끼는 꽃이 되고 담쟁이는 잎이 되니
조물주가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않았음을 알겠노라.
는 말이 아주 새롭고도 기이하다. 또 연흥부원군의 연석에서 지은, 피서풍류경불해 율시는 한때 여러 문인들이 모두 붓을 놓을 정도였다. 지금 보건대 이 작품이 좋기는 하나 그것이 좋은 것인 줄을 아는 이는 정말 드물 것이다. 비록 알았다고 해도 꼭 붓을 놓아 그의 성가를 높여주려 하지 않았을 것인데 아마도 당시에는 참으로 아는 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이는 스스로 천하 문장이라고 자부하여 자신을 받드는 데 구차하지 않았다. 참깨로 소를 먹이고 평상시 거처할 때 꼭 비단 장막과 화려한 도포를 입었으며 조정의 선비를 접대할 때는 아주 거만했으나, 당시의 문인들이 모두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수업을 받았는데 역시 많은 이들이 그를 밀어올려 승정원 제조에 제수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그의 문장이 귀하게 여길 만하다는 것을 참으로 아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