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國朝東槎之盛 莫過於龔用卿 時 容齋為儐使 湖陰 暘谷 安分李希輔為從事 俱得人也 壬寅 顧天峻時月沙為儐使 東岳 南郭朴東說 鶴谷 為從事 石洲以白衣 車五山 梁霽湖慶遇以製術 金南窓玄成 韓石峯濩以筆從 各藝之盛 此行反復勝矣 五峯 西坰柳根為迎慰 簡易適僑居于箕城 時人謂之 文星聚關西云 初月沙薦石洲於榻前 請帶去 宣廟欲聞其詩 卽誦夢具容一絕 以對 其詩曰 幽明相接杳無因 一夢殷勤未是眞 掩淚出山尋去路 曉鶯啼送獨歸人 上大加稱賞 命徵詩稿以入 簡易贈石洲詩所謂 聞說至尊徵稿人 全勝身到鳳皇池者 此也 宣廟愛而不名曰 石洲與具 友道之深幾許 而詩語之悲若此也 當時布衣之榮 不下於李供奉矣
조선에 온 중국 사신으로 알려진 이 중 공용경을 넘어서는 이는 없었다. 당시 용재가 접반사가 되었고 호음 양곡 안분 이희보가 종사관이 되었으니 사람을 얻어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임인 고천준이 왔을 때는 월사가 접반사가 되었고 동악 남곽 박동설 학곡이 종사관이 되었으며 석주가 백의로 종사관이 되었고 차오산 재호 양경우는 제술관으로, 남창 김현성 석봉 한획은 사자관으로 따라갔으니 각각의 재주의 성함이 이때의 행적이 도리어 나았다. 오봉 서경 유근이 영위사가 되었는데 간이가 마침 기성에 잠시 살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일러, “문성이 관서에 몰렸다.”라 했다. 처음에 월사가 탑전에서 석주를 천거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했다. 선조가 그의 시를 들어보고자 하자 즉시 몽구용 절구를 읊어 대답하였는데 그 시,
유명이 달라 서로 접하기 묘연해서 인연이 없는데
꿈속에서 은근히 만나되 실제가 아니로세.
눈물 가리고서 산을 나와 갈 길 찾노라니
새벽 꾀꼬리가 홀로 돌아오는 이 보내더라.
임금이 크게 칭찬을 하고서는 시고를 들이라고 명하니, 간이가 석주에게 준 시에서 말한,
듣자 하니 지존께서 시고를 들이라고 하셨다 하니
오로지 몸이 정승이 된 것보다 낫다네.
라는 것이 이것이다. 선조께서 사랑하시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석주와 구용의 우정 깊기가 어느 정도였기에 시어가 이처럼 슬픈가?”라 하셨다. 당시에 포의로서의 영광이 이백에 못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