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금요일 밤. 딸아이와 통화.

"낼 5시 경복궁역 6번 출구에서 만날랴? 그때 그 선생님들이랑 만나기로 했거든!"

"그 선생님들과 만날 거면 전 싫어요. 그리고 그길로 내려가시려구요?"

"아니, 그럼 딸이랑만 만나지 뭐?"

"기냥 내려가실 거잖아요?"

"아니, 그럼 집에 가지 뭐?"
"그래요, 그럼 나갈께요."

참 비싸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한 밤을 자고, 아니 그길로 버스 예약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11시 반 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터미널에 도착한 것이 15시. 3호선을 타고 가면서 딸아이에게 전화.

"터미널이당! 경복궁역 6번 출구에서 몇 시에 만나랴?" 카카오톡질

"5시용!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갈께요."

3호선 전철을 타고 안국역에 내리니 3시 40분.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 광화문쪽으로 세월아네월아 하며 걷는다. 길을 건너고 또 건너고 그래서 민속박물관 입구로 들어가 경복궁을 돌아본다.

"티켓이 필요합니다."

"저 경로인데요."

"뭐 보여주실 거 있으신가요?"

주민등록증을 내보이자 그냥 들어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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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많기도 하다. 토요일이라서 그런가 유난히 우리옷 차림의 아가씨들이 많이 보인다. 무슨 날인가 싶을 정도였다. 곱게 차려 입은 우리옷 맵시가 예쁘다. 나도 인증샷을 한 컷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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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아마도 연인 사일거 같다. 두 손을 꼭잡고 나들이. 어느 외국인 관광객의 눈에도 예뻐 보였나 보다. 기념촬영을 부탁하는 그들에게 참 친절히도 응해 준다. 하는 짓도 예쁘다. 다만 둘의 겉옷과는 달리 안에 받쳐 입은 옷과 신발이 격(?)에 안 맞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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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을 나와 광화문 밖에서 찰칵한 인증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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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직은 시간이 일러 조용하다. 무대 앞에 벌써 깔개를 놓고 앉아서 기다리는 이들도 많다. 깔개값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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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갔다 하는 품이 모두가 여유롭다. 분주하게 오가는 이가 없다. 다들 조용하다. 간간히 확성기 소리가 들려올 뿐 조용하기 그지없다. 차소리도 숨을 죽이는가 보다. 세종대왕은 무슨 죄가 있어 저러고 손을 든 채 벌을 서고 있는 걸까? 벌써 몇 해 몇 날째일까? 벌이 끝나는 날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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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반 세종로를 오락가락하며 찰칵. 노란 풍선과 커다란 굴리개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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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가 다 되어 기다리던 경복궁역 6번 출구에서 딸아이를 만났다. 그리고 둘이서 세종로를 다시 누비고 다녔다. 그러면서 딸아이가 찰칵해준 인증샷이다. 뭐가 그리 좋다고 내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저러고 있었을까?

세종로 길을 걸어걸어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러 종로통으로 들어서서 걷다가 우리는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가는 곳은 청진동.

걷다보니 피맛골이다.

옛 기억을 더듬어 '청일집'을 찾아드니 먼저 온 이들이 많다.

서울막걸리 한 병, 빈대떡 한 접시.

그렇게 시켜 딸아이가 따라주는 한 잔을 들이키고 나니 시원타. 뭘 더 바랄까?

서울막걸리 한 병 더. 그리고 황태탕 하나 추가.

황태탕을 시켰었는데 그만 굴탕이 나왔다. 군말 없이 바꾸어 준다. 세상 참 많이도 달라졌다. 그냥 먹겠다는데도 궂이 바꾸어준다.

참 시원코 맛도 좋다. 우리 둘은 연신 감탄 또 감탄.


청일집 텁텁한 술 빈대떡 한 젓가락

황태탕 고소한 맛 천상에서 왔으려니

딸이랑 둘 마주앉아 잔 기울여 웃노라


차차 어둠이 내려깔리기 시작하고 형광불빛도 하늘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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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먼 훗날훗날 자신에게 미소하려

당일치기 세 번을 했다고 말했더니

화들짝 수구꼴통이 해대는 말 '미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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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두 사진을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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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인네가 든 촛불이 타올라 기름장어를 구워버렸다 했다. 거짓말쟁이는 구울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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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와 총리공관까지 행진을 하는 대열에 끼어들었다. 삼청동 길 거기도 내가 낸 세금을 쓰는 경찰이 우리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세상은 참 엉터리다. 세금을 낸 사람은 힘을 못쓰고, 그 세금을 써대는 이는 큰소리치고 산다. 그것도 입만 열면 거짓말.

삼청동 길에서 막혀 딸아이와 나는 돌아서고 말았다.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언제나 속시원히 뚫리는 날이 올까?


한 세상 모두가 왔다가 가는 것을

뭐 그리 가질 게도 많다고 아웅다웅

욕심을 부리고서도 모자라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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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虎孝子碑

肯鉉晩寓鈴泉之南牧虎院, 牧虎之云, 甚奇且恠矣. 問諸同里崔鶴舜, 得其槩焉, 繼而金東湖光祜至, 說此事載閔南磵檃遺集中, 借來讀之, 其畧曰,

此地舊有院. 院直忘其姓名, 性孝奉母誠勤. 一日有事, 諭荻嶺行, 遇一老僧, 僧曰, 奚之夕, 虎將食而母. 雖然, 如是如是, 庶可免矣. 孝子涕泣徑歸, 齋沐汎掃, 固扃鐍而守之, 果有大蟲咆哮而至. 孝子以身當之, 投衣裳, 設糜糊而諭之, 虎乃止啜糜. 自後三年如一日, 馴服如家畜, 母亦幸康以天年終. 此名之所由始也.

嗚呼! 古來以孝名者何限, 而未聞有此事. 若使斯人生士大夫家, 得位與名, 此奚但雀鯉故事? 而地賤命單, 千古懿蹟, 將歸湮滅, 僅僅傳於草茅寒儒寂寞數行語, 可慨也.

今距南磵且數百年矣. 若復幾年, 故老已盡, 殘編斷爛, 則又將如何? 南磵所謂, 或久而不傳, 則林下闕文之誚, 將有所歸者, 眞曠世同感. 而况今彝倫斁喪, 大防盡壞, 肯鉉豈敢以林下自待? 但懼至行之易泯, 祈風化之有補, 竪石表出, 理性所均, 其有觀感而興起者乎.

嗚呼! 孰無父母, 孰非人子? 古人曰, “天下無道, 公論在野.” 後之覽斯文者, 又有以知老婆心苦也否? 牧虎院, 今丹光里也.

昭和十五年(1940)庚辰春五月日

光山後人, 碧湖金肯鉉記

靈光後人, 敬庵金漢禧書

호랑이를 기른 효자의 비

긍현이 만년에 영천의 남쪽 목호원에서 임시로 지내고 있었는데, ‘목호(호랑이를 길렀다)’라고 한 것이 심히 기이하고 괴상하기만 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최학순에게 그 이유를 묻고서야 그 대강을 알게 되었으며, 이어서 광호 김동호가 이르러서 이 일이 민남간의 은유집 속에 실려 있다고 말하는지라 그것을 빌려와 읽어 보니, 그 대략은 이렇다.

이 지방에는 옛날에 ()’이 있었는데, 원지기는 그 성과 이름은 잊혀졌지만 성품이 효성스러워 성심을 다해 부지런히 어머니를 봉양하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일이 있어 적령을 넘어가는 길에 한 노승을 만났는데, 스님이 말하기를, “아무 날 저녁에 호랑이가 너의 어머니를 잡아먹으려 할 것이다.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이러이러하면 거의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효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곧바로 돌아와 목욕재계하고 두루 청소를 한 다음 문빗장과 걸쇠도 단단히 걸고서 지키고 있었는데, 과연 호랑이가 포효하며 이르렀다. 효자가 몸으로 막으며 저고리와 치마를 던져 놓고는 싸래기죽을 차려서 달래니, 호랑이가 곧 멈추고서 죽을 먹었다. 이로부터 그러기를 삼년을 하루같이 하였더니, 호랑이가 길들여져 마치 가축처럼 복종하였고, 어머니 역시 행복하고 건강하게 천수를 마쳤다. 이것이 () 이름이 유래된 시초이다.

오호라! 예로부터 효로써 이름난 이가 어찌 제한이 있겠느냐마는,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음을 아직 들어 본 적도 없다. 만약에 이 사람을 사대부가에 살게 하여 벼슬과 명예를 얻게 하려면, 이 어찌 다만 참새와 잉어의 고사(故事)뿐이겠는가? 그러나 지위도 천하고 운명도 박하여 천고의 아름다운 효행이 장차 흔적도 없이 없어지려고 하고, 겨우 초야의 빈한한 선비의 적막한 두서너 줄의 말에나 전해지고 있으니 개탄스럽도다.

이제 남간과 시간적으로 수백 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만약 다시 몇 년이 지나 옛일을 잘 알고 있는 노인네들이 이미 다 돌아가신다거나, 책 중의 일부가 없어지고 책장이 찢어져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또한 장차 이를 어찌할 것인가? 남간의 말한 바가 혹시 오래되어 전해지지 않는다면 글을 빠뜨렸다는 초야의 꾸짖음으로 장차 귀착될 것이라는 것은 참으로 온 세상이 동감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떳떳한 인륜이 부서지거나 상실되어 큰 방어막조차 다 무너졌으니, 긍현이 어찌 감히 초야의 은퇴한 선비로서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다만 지극한 효행이 쉽게 없어지는 것이 두렵고, 풍습의 교화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비석을 세워 드러내나니, 사람의 이성은 같은 것인지라 아마도 보고 느껴서 감동에 떨쳐 일어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오호라! 누구인들 부모가 없을 것이며 누구인들 남의 자식이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하에 도가 없으면 공론이 초야에 있다.”고 하였으니, 후세에 이 글을 보는 사람 역시 이런 노파심의 고충을 아는 이가 있을까 없을까? 목호원은 지금의 단광리다.

소화 15(1940) 경진 봄 5월 일

광산후인 벽호 김긍현이 짓고

영광후인 경암 김한희가 쓰다





孝婦孺人晉州蘇氏之墓

 

孝婦蘇氏甫踰筓歸金永允越五年戊辰十二月五日庚申急痞而歿

得年二十一其舅碧湖金肯鉉甚悼惜之不欲其同於凡墳而謀所以

表之者石旣具請於余曰新婦性溫靜語言有度步履以正一言蔽之

曰不凢善事我而宜家人閨門之內和氣藹然雖婢背有大過止曰汝

何失常度而已不出惡言以詈亦不言畜生此文饒之所難吾嘗患痢

一晝夜十餘上厠夜則新婦伺吾起如持燭立圖外容光以照內盖慮

登降跧躓也病且滿三月食性全失如嚼絮然新婦雪裏採菜菜蔬魚

肉一案十數合亦冀吾隨合下箸以或有可口者未嘗有一日間古語

云孝則生福心中期以唐夫人緣吾祗薄失此賢哲痛矣乎哉余曰夫

子以人不問其父母昆弟稱閔子之孝今於孝婦孰能問其舅之言孝

旣如此而天且無育誰尤尤眞宰乎蘇氏晉州著姓父禹永祖前度支

部主事錫斗大提學陽谷諱世讓后永允光山大姓黃龍湖又名家序

次世德實行系以銘曰

嗟哉孝婦天性芳玆胡秀不實長令舅悲至行難泯石以揭辭戒爾櫵

牧無或近之

歲庚午正月下休

濯新金漢穆撰

少石奇東衍書



호랑이를 기른 효자의 비

긍현이 만년에 영천의 남쪽 목호원에서 임시로 지내고 있었는데, ‘목호(호랑이를 길렀다)’라고 한 것이 심히 기이하고 괴상하기만 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최학순에게 그 이유를 묻고서야 그 대강을 알게 되었으며, 이어서 김동호, 광호가 이르러서 이 일이 민남간의 은유집 속에 실려 있다고 말하는지라 그것을 빌려와 읽으니, 그 대략은 이렇다.

이 지방에는 옛날에 ‘원(院)’이 있었다. 원직(원에 근무하는 아전)은 그 성과 이름을 잊었지만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머니를 봉양하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일이 있어 유적령 가는 길에 한 노승을 만났는데, 스님이 말하기를, “어느 날 저녁에 호랑이가 장차 너의 어머니를 잡아먹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이러이러하면 거의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효자는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근무하던 院直조차) 사임하고 급히 돌아가 목욕재계하고 두루 청소도 하고 문빗장과 걸쇠도 단단히 하고서 지키고 있으니, 과연 호랑이가 포효하며 이르렀다. 효자가 몸으로 막으며 저고리와 치마를 던져 놓고 그 위에 죽을 차려서 타이르니, 호랑이가 이에 멈추고서 죽을 먹었다. 이로부터 이러기를 삼년을 하루처럼 똑같이 하였더니, 호랑이가 길들여져 마치 가축처럼 복종하였고, 어머니도 또한 행복하고 건강하게 천수를 마쳤다. 이것이 (院의) 이름이 유래된 시초이다.

오호라! 예로부터 효로써 이름난 자가 어찌 한이 있겠느냐마는,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음을 아직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만약에 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대부가로 살면서 지위와 명예를 얻도록 한다면, 이 어찌 단지 참새와 잉어의 고사(故事)로 유명한 효자 왕상(王祥)뿐이겠는가? 그러나 지위도 천하고 운명도 박하여 천고의 아름다운 (효의) 행적이 장차 흔적도 없이 없어지려고 하고, 겨우 초야의 빈한한 선비의 적막한 두서너 줄의 말에 전해지고 있으니 개탄스럽다.

지금 남간과 시간적으로 수백 년이나 떨어져 있다. 만약 다시 몇 년이 지나 옛일을 잘 알고 있는 노인들이 이미 다 돌아가신다거나, 책 중의 일부가 없어지고 책장이 찢어져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또한 장차 이를 어찌하겠는가? 남간의 이른 바, 혹시 오래되어 전해지지 않는다면 은퇴한 선비의 글을 빠뜨렸다는 꾸짖음이 장차 돌아갈 곳이 있으리라고 한 것은 참으로 세상에 보기 드물게 동감하는 말이다. 하물며 지금 떳떳한 인륜이 부서지거나 상실되어 큰 방어막조차 다 무너졌으니, 긍현이 어찌 감히 임하의 은퇴한 선비로 스스를 대우하겠는가? 단지 지극한 효행이 쉽게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풍습의 교화에 도움이 있기를 기원하며, 비석을 세워 드러내나니, 사람의 이성은 같은 것인지라 아마도 보고 느껴서 감동이 떨쳐 일어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오호라! 누구인들 부모가 없을 것이며 누구인들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하에 도가 없으면 공론이 초야의 민간에 있다.”고 하였으니, 후세에 이 글을 보는 사람도 또한 이렇게 애쓰는 노파심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목호원은 지금의 단광리다.

소화 15년(1940) 경진 봄 5월 일
광산후인 벽호 김긍현이 기록하고,
영광후인 경암 김한희가 쓰다.


* 인곡 박선생께서 번역하신 글이다. 감사 감사 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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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또 거닐다 왔다.
을지로입구 ---> 시청앞광장 ---> 구 국제극장 골목 ---> 세종회관뒷골목 ---> 경복궁역 사거리 ---> 내자동 전경앞 ---> 다시 광화문 현판아래 ---> 청진동골목 ---> 종로통 ---> 종각역
그리고 전철을 타고 용산역에 가서 밤 8시 25분 새마을열차를 타고 집에 오니 12시 반이었다. 새벽 3시반에 집을 나서서 그 시간에 왔으니 21시간의 여정이었다.
오가는 열차에서의 잠은 꿀잠(?) 아니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이었다.
그래도 가야 하는 마음 나도 모른다. 내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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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스로에게 덜 부끄럽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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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어느 날 아내와 나, 형님 내외분, 그리고 내 수채화 샘 그렇게 우리 다섯은 일행을 이루어 산골인 우리 고장 마을을 출발해서 바닷가 마을을 찾아 나섰다. 물론 중간에서 차 셋이 모여 둘에게는 휴가(?)를 드리고 튼튼한 SUV차로 바꾸어 탔다. 앞에 형님 내외분, 뒤에 우리 내외 그리고 내 옆에 수채화 샘. 우리 일행의 총 나이 합이 우리 나이로 360년.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 계산을 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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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1020732.jpg 내가 그린 수채화 솜씨

목적지는 <*자나무집>. 목적은 쭈꾸미 요리 시식.
물론 내 아내가 전 날 ‘쭈꾸미를 먹는다’는 말에 설레어(내 아내는 해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특히 회, 멍게, 쭈꾸미. 그래서 젊었을 때 아내가 화가 나 있으면 회를 사 들고 들어갔다. 그러면 금방 풀린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아낸 집이다. 언뜻 지나가는 말로 들은 건 고창 어딘가에 있다 했다

조수석 통신 45 왈,
“어디로 갈 건데?”
내 곁 통신 33 왈,
“고창 <*자나무집> 갈 건데요!”
“아, 거기 우리도 알아.”
“가보셨어요?”
“그러엄!”
조수석 통신 45께서 뻐기신다.
내 곁 통신 33, 호기심이 금방 발동한다.
“맛있어요? 멀어요? 언제 가보셨어요? 길은 알아요?”
조수석 통신 45께서 이 대답을 어떻게 한꺼번에 다 한다는 말인가?
운전수 통신 49 왈,
“제가 길을 알아요!”
내 곁 통신 33,
“그래도 네비게이션 찍고 가시지요.”
내 곁 통신 33께서는 길 찾는 데 걱정이 되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갔는데도 길이 이리 꼬불 저리 꼬불 한 시간 하고도 여러 분을 달렸는데도 목적지는 오리무중이다. 논길도 지나고 드넓은 신작로(?)도 지나고 그래도 바닷가는 나타날 조짐이 전혀 안 보인다. 그런데 야산을 돌아 마을길로 들어서는 게 아닌가? 길찾는 데 고생 좀 하는가 싶었다.
왜냐? 내 머리 속에는 선입견이란 녀석이 벌써 똬리를 턱 틀어버렸기 때문이다.

‘쭈꾸미는 해물이다.
그러므로 바닷가에서 팔 거다.
그러니 우리가 가는 집도 바닷가에 있을 거다.
해서 바다가 안 보이니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런데 눈을 씻고 봐도 바다가 보이지를 않아서다.
웬걸? 마을 초입에 커다란 입간판이 보인다. 왈,
<*자나무집>
운전수 통신 49 왈,
“저깁니다. 다 왔어요.”
나 통신 42 뜨악해서 왈,
“저 집에서 쭈꾸미를 팔아요? 바닷가도 아닌데...”

그런데 길가 여기저기 차들이 많이도 주차되어 있다. 관광버스도 여러 대 서 있다.
그때 내 수채화 샘 통신 41 왈,
“아, 여기 저도 한 번 와 본 적이 있어요.”

그러니 우리 일행  중 세 분은 이미 와 보신 경력(?)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 내외만 초행길이라는 말씀.
집이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하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자 보통 넓은 게 아니다. 별채도 있고 본채도 있었는데 우리는 별채로 안내를 받았다. 이 정도 되면 기업 수준이다.
식탁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거의 만원. 우리도 탁자 둘을 배정받아 신발을 벗고 올라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고, 시골길 논길을 한 시간 반이나 헤매다가 찾아온 쭈꾸미집. 기대 만땅이었다.

‘쭈꾸미 두 접시, 해물국수 대, 소주 1병’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이 야그 저 야그. 내가 뭔가가 궁금해져서 스마트폰 검색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내 곁 통신 33께서 목소리를 높여,
“스토옵! 그대로 계세요!”
그리고는 일어서더니 내 검색 꼬라지를 찰칵해대신다. 좀 어리둥절했지만 무슨 사연이 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말았다. (후에 안 얘기지만, 아마도 맨날 허리를 펴라는 얘기를 해도 내가 듣는 둥 마는 둥 한다고 여겨 증거를 보여주려고 했었나 보다.)

‘그런데 이것이 나를 충격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줄이야!’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쭈꾸미 두 접시 대령. 아니 그런데 그게.
나 통신 42 왈,
“에게에, 이게 뭐야? 이걸 누구 코에 붙여?”
나온 주꾸미 두 접시 분량이 장난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말이다. 푸짐한 쭈꾸미를 기대했었나 보다.

옛날 서울 왕십리 어느 해물을 파는 가게에서 쭈꾸미를 아내와 둘이 먹어본 적이 있었다. 샤브샤브 형태로 나오는 요리였는데 몸통에는 알이 빽빽이 들어차서 마치 잘 찐 찰꼬두밥을 먹는 맛이어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뒤로 본격적인 그런 쭈꾸미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말은 안 했지만 아내보다 속으로는 내가 더 설레는 마음이었다.
‘그 맛있었던 쭈꾸미알 밥을 먹어 볼거라고!’

그런데 뎅그마니(?) 나온 데친 쭈꾸미요리 두 접시가 내 눈에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실망 또 실망 아니 허망하기까지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했던가? 그런데 다른 분들은 아무렇지도 않으시다. 으레 그러려니 하시는 모양이다. 그냥 맛있게들 잡수신다.
나도 젓가락들 들고 부실한 그 쭈꾸미 다리부터 몇 개 먹기 시작. 그런데 맛은 그만이었다. 그 맛에 빠져 다른 분들은 아무 불평도 아니하시고 잡수신 모양이다. 작은 몸통도 하나 먹어 보니 맛이 좋다. 그 안에 알도 쬐끔 들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알 씹히는 맛은 일품. 우리는 그 맛에 이끌려 데친 쭈꾸미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고는 입맛을 다시며 해물국수를 고대.
해물국수는 푸짐하다. 맛도 그럴 듯했다. 먹고 남고 먹고 남고 그렇게 민생고(?)를 소주 한 잔 곁들여 해결하고 나니 긴장이 풀려 노곤하다. 아마도 나이(?)탓일게다.

내가 계산대에서 하소연.
“쭈꾸미 분량이 좀 그래요!”
주인 왈,
“제 철인데다가 쭈꾸미가 워낙 비싸서요.!
그러면서 주인아주머니도 미안해 하신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예 <*자나무집>입니다. 아, 그러세요? 그런데 손님 죄송해서 어쩌지요? 요즘은 회를 준비해 드릴 수가 없어서요. 예. 그러게요. 워낙 바빠서 쭈꾸미요리 내기도 벅차답니다. 예 죄송합니다.”
곁에서 들은 주인아주머니 전화 내용이다. 다른 요리들을 준비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쭈꾸미요리를 찾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했던가?

밖으로 나오니 화창한 봄 날씨다. 배가 부르니 이제야 주위의 경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논 가운데 작은 마을. 그곳 초입에 들어서 있는 <*자나무집>. 앞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2차선 길이 그 언덕을 돌아 왼쪽으로 뻗어있다. 그 언덕 뒤쪽에 바다가 있단다. 내가 기대하고 갔던 바닷가가 맞기는 맞았다.

돌아오는 길은 쉽게 쉽게 길을 찾았다. 한 번 가 본 길이라고.
솔재 고개를 넘기 전 석정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씩 하며 노닥노닥. 참 한가하고 즐거운 짬이다. 나도 처음으로 수채화 샘 41과 함께 내 곁 통신 33이 추천하는 ‘아포가토’ 맛을 봤다. 우리 둘은 서로 마주보고는 씨익 웃는다. 아포가토 커피와 아이스크림이 맛이 ‘죽인다’는 뜻이다.


아포가토-694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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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봄날의 즐거운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는 나는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내 곁 통신 33에게서 문자가 왔다. 메시지도 생략 상태로 사진만 달랑 두 장.
나는 그 사진을 보고는 망연자실. 앞에서 말한 바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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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의 나락(奈落)’

사람은 누구나 착각 속에서 살게 마련이라고들 한다. 내가 바로 착각의 꿈속에서 살아온 걸 순간 깨달은 거다. 지꼴도 모르고,

‘지가 무슨 청년이라고’.


사진 속에는 이제는 다 늙고 찌들어 하느님 곁으로 갈 날만을 기다리는 노인네가 보이지를 않는가! 그게 바로 나였다니까.

“등은 구부정, 머리는 듬성등섬 반 백. 쭈구렁 할배가 보이지 않는가?”


* 360이라는 숫자가  하 민망해서 각 통신에서 30을 뺀 숫자다. 그게 우리 일행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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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색시가 하는 말,

"여보, 낮에 칼국수 먹으러 가요."

색시는 어제 저녁도 속이 불편하다며 안 먹었다. 그래서 아침도 못 먹은 차에 뭔가가 허전한가 보다.

"그러지요. 어디로 갈까요?"

"정읍이요. 아니 황선생님도 모시고 가요. 그리고 오선생님께도 전화해 보세요. 언니가 오늘 모임 있댔으니까 오선생님 혼자 계시면 모시고 갑시다."

그래서 내가 오선생께 따르릉 신호를 보냈다.

"여보세요!"

"예 저 진운데요. 오늘 두 분이 같이 가시나요?"

"예, 부부모임이요."

"형님 혼자 계시면 모시고 점심 사드리려고 했는데........ 그럼 잘 다녀오세요. 우리끼리 갑니다."

그래서 황선생과 '솟집'(사연이 있다. 좀 웃기지 않는가? 소고기 가게가 있는 집을 말한다면서 언뜻 떠오르지가 않아 급한 김에 솟집이라 했더니 색시가 깔깔 깔.) 앞에서 11시 반에 만나기로 했다.

그제 주문한 찰칵이 택배로 온다기에 확인차 전화. 한 시간 내로 온단다. 그러면 11시 전에 온다는 야그.

그런데 색시에게는 수리했다고 했다. 또 찰칵을 바꾸면 비용이 드니 염치가 없어서다. 중국여행비용 300만 원 거기다 찰칵 100만 원이 더해지면 우리 형편에는 무리다. 그런데 찰칵을 고치고 망가진 후드를 구입하려면 아마도 몇십만 원이 들거다. 그러느니 차라리 그걸 보상받고 새로 사는 게 낫겠다 싶어서다. 그래서 소니 RX10-2로 바꾸려 했더니 우영사장이 Leica를 추천해 준다. 값 차이는 겨우 20만 원. 그래도 대중용이라고는 하지만 라이카가 아닌가! 그래서 응했다. 그 찰칵이 온단다.

택배를 받아서 급히 조립. 11시 20분에 출발.

그 '솟집'에 도착하니 황선생이 이미 와서 하차중이다. 우리 차로 옮겨타고 국도를 타고 출발. 국도변의 가을경치가 참 좋다.

사거리까지는 별 무리 없이 잘 가다가  갈재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그만 이정표를 잘못 해독하는 바람에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오는 해프닝을 벌였다. 그리고 우리 셋 씨익 웃고. 갈재를 구불구불 넘으니 저수지상류가 나온다. 가물어서 입암저수지에도 물이 없어 바닥을 거의 드러내놓고 있다. 황선생 왈,

"호수와 저수지는 어떻게 다른가요?"

내 말이,

"호수는 물이 그냥 자연적으로 고인 큰 물웅덩이고, 저수지는 물을 이용할 생각으로 사람이 막아 만든 물웅덩일 겁니다."

"양평에 가면 湖沼라고 써 있어요. 호소는 뭐지요?"

"소는 아마도 늪을 얘기할 겁니다. 함 찾아볼게요."

그 답. - 湖는 큰 못, 沼는 늪인데 曲池란다. 내 설명이 대충 맞은 셈이다.


네비아가씨가 알려주는 대로 가니 우리가 목표로 했던 중국요리집 '양자강'이 나오기는 했다. 그런데 조그만 그 음식점 앞이 난리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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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서서 대기중인데 그 줄이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치며 멍한 눈으로 구경 그야말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언론의 힘이 아니 언론의 병폐가 저렇듯 크다는 말인가! 하기사 우리도 그걸 먹으러 온 족속 중의 하나였으니까.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기는 하다. 그만 우리는 포기하고 차를 돌렸다. 그리고 정읍 시장통으로 가다 차를 어디다 세워두고 두리번두리번 마땅한 음식점을 찾았다. 길가의 전자제품을 수리하며 파는 할아버지께서 참 친절하게도 안내를 해 주신다.

"저어기, 저 골목을 돌아 들어가면 거기가 바로 시장토이랑께."

"감사합니다."

눈을 들어 저어기 저 골목 어귀를 보니 입간판이 우리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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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의 문을 밀고 들어서니 아담하다. 조용하다.  그래서 칼국수 3인분, 비빔냉면 하나를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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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도 칼국수도 먹을만하다. 깎두기 갓김치가 맛갈스럽다. 주인과 종업원이 장성에서 왔다니 반색을 한다. 황룡어디어디를 아느냔다. 황룡이 고향이란다.

양자강 왔다가는 문전박대 당하고서

장터목 왔더니만 칼국수 맛갈스러

한두 입 먹었더니만 남산만한 내 배야

이제는 두 번째 갈길이다. 주인이 알려주는 대로 <쌍화차거리>를 찾아가면서 시장거리에서 한약상도 지나고 옷점도 지나고 그러다 보니 정읍여자중학교 앞에 쌍화차거리 입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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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길로 돌아드니 거기 다방도 있고 찻집도 있다. 한 곳을 찾아 들어가니 그곳이 대나무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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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차 세 잔 금 7000 x 3= 2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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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 무거운 몽돌잔을 뚜껑을 여니 세 잔 중 하나가 다르다. 동동 뜨는 은행알이 한 잔에는 없는 거다. 왜 그러냐니까 종업원 왈,

'아마도 끓이면서 넣는 걸 빼먹었나 봐요. 죄송합니다. 넣어서 다시 끓여다 드리지요." 하고는 잔을 들고 간다. 색시가 왈,

"한 잔만 시켰음 은행알이 없는 줄도 모르고 먹었을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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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요령이 있단다. 뜨거우니까 내용물 곧 건더기를 숟가락으로 건져먹다 보면 차가 식어서 딱 마시기에 좋게 식는단다. 숟가략으로 떠먹어도 먹어도 밤이 나오고 대추가 나오고 은행이 나오고 그러더니 다 건져먹었다 싶으니 정말 마시기에 딱 알맞게 식어있었다. 우리 셋이 하는 말,

"참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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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등이, 호박이 유별나게 눈에 들어온다.

차를 말 그대로 배불리 먹고, 아니 마시고 나와서, 그 차거리 골목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니 그곳이 문제의 그 <양자강>이다. 그런데 2시가 지난 그 시간까지 장사진이다. 아직도 음식을 먹을 차례가 오려면 3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단다. 참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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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정읍은 거리도 깨끗하고 넓고 컸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이다.


돌아오는 길에 오선생댁엘 들렀다. 황선생께서 땅콩을 전해 드리는 것으로는 못잊어 손수 찌는 시범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구실을 앞세워서다. 오선생내외 참 반갑게도 맞이하시더니 이약이약하다가는 저녁을 먹고 가야 한다면서 고창 콩나물국밥집으로 데리고 가신다.

베불리 먹고 빠이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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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몇달 전 지나가는 말처럼 내게 그랬다.

"아빠, 프레지던트컵 갤러리 가실래요?"

"으응!"

그리고는 잊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10월 10일이래서 따라나섰다.

송도까지 한 시간여를 달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셔틀버스로 갈아탔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


생전 처음 일이라 처음엔 그저 낯설었다.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탄성을 지르고........... 그중에 나도 한 몫을 하다니!

내 소감 - 역시 세계적 선수고 프로답다. 찬탄이 저절로 터진다.

딸 덕분에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구경 참 잘했다.

잘 다듬어진 골프장에,

날씨도 적절하게 쌀랑거리고 햇빛도 적당했던 하루 - 딸아이에게 감사.


하나 유감.

진행요원들의 어투? 완장 찼다고 갤러리들을 나무라고 야단치고 짜증을 내고.........

물론 몰상식하게 찰칵을 해대는 갤러리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지들이 뭐라고 어른들을 나무라고,

성인들에게 화를 내고.......... 참 어이가 없다.


갤러리

 

아침에 딸아이랑 챙 모자 달랑 들고

애써서 들뜬 마음  감추고 나섰더만

금잔디 너른 들판에 내 혼마저 앗겼네

 

시원스레 휘두르는 배상문 고운 樣姿

갤러리 한 마음에 탄성을 자아내고

저 멀리 창공에 뜬 공 꽃답기도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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