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我東文人 毎與華使唱酬 皆用律詩 故如湖陰大手 至於古詩長篇 不能工 唯權石洲深曉古詩體 其忠州石 送胡秀才 等篇 絶佳 殊非東人只事排比之流 近世 東溟鄭君平 杰出一代 掃盡浮靡之習 其所著歌行 雄健俊逸 可方於盛唐諸子 如俠客篇曰 幽州胡馬客 匕首碧於水 荊卿西入咸陽日 待者何人此子是 惜哉不與俱 藏名屠狗家 空對燕山秋月色 時時吹笛落梅花 此等作 求諸唐詩亦罕 評者謂 我國之文 超越前代 可與中國因幷驅者 有二 踈庵之騈儷 東溟之歌行云
우리나라 문인들이 늘 중국 사신과 시를 주고받을 때에는 모두 율시를 사용했다. 그래서 호음과 같은 대가도 장편고시에 이르러서는 공교롭지 못했다. 오직 권석주만이 고시체에 아주 밝았는데, 그의 충주석 송호주재편 등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워 우리나라 문인들 중 다만 나열하기만을 일삼는 부류와는 달랐다. 근세에 동명 정군평이 한 시대에 걸출해서 부미한 습속을 다 쓸어버렸으니 그가 쓴 가행은 웅건하고 준일해서 성당의 여러 시인들과 견줄 수 있다. 그의 협객편.
유주의 호마를 탄 나그네
비수는 물도곤 시퍼렇구나.
형가가 서쪽으로 함양에 드는 날
누구를 기렸던가, 바로 이 사람
애석도 하구나, 함께 가지 못하고
개백정 사이에 이름을 숨겼네.
헛되이 연산의 가을빛 대하며
때때로 피리를 부노라니 매화만 지네.
이들 작품은 여러 당시에서 찾으려 해도 드물다. 평자가, “우리나라의 글 중 전대를 넘어서는 중국의 글과 나란히 달릴 수 있는 것이 둘 있는데 소암의 변려문과 동명의 가행이다.”라 했다.